복음과 상황에 기고했던...<새로운 자본주의 도전하라> 홍보글
1980년대 우리나라 어느 방송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는 뉴스 원고에 있는 ‘사회정의에 입각한’을 그만 ‘사회주의에 입각한’으로 잘못 읽고 말았다. 한번 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는 법. 아나운서는 이내 등골이 오싹해졌고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일에 대한 두려움에 다음 뉴스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뉴스 후반부에 아나운서는 방금 전 했던 사회주의 발언(?)을 정정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이념적 분단을 겪고 전쟁을 치른 한국에서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써서는 안 될 금기의 용어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분명한 서로 다른 개념의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빨갱이=인간 말종, 민족의 원흉’이란 등식은 지난 세월 우리의 모든 가치와 판단에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을 위시한 동유럽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면서 공산주의와 관련된 용어들은 이내 역사의 패잔병이 되어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갔다. 중국이 개혁 개방을 하고 민족의 반쪽인 북한도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것을 보며 공산주의 광풍은 더 이상 과거처럼 우리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경제적 자유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빈익빈 부익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계 곳곳에서 붉은 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공산주의도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 지나친 전체주의로 인해 자가당착의 결말을 보게 되었다.
공산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자동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지만 여전히 하루를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있고 잘사는 선진국과 못사는 후진국 간의 불공정한 무역은 여전하다. 또한 우리나라 안에서도 빈부격차가 더욱더 벌어지고 빈곤의 문제가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힘든 구조적인 문제가 되어버리는 사회양극화 문제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인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30여 년 전부터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적 취약계층의 자립과 자활을 위한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이 육성되고 기업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일반화되기 시작했으며 환경․사회문제에 관련하여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책임투자’(Socially Responsibility Investment) 기법이 나와 투자를 통한 사회 참여의 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라 선진국 소비자와 후진국 생산자 간의 공정거래의 다리를 놓는 ‘공정무역’(Fair Trade),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금융 프로그램인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이 지구촌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의 총칭을 경제적 모순의 대안을 찾는다고 해서 대안경제(Alternative economy),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 넓은 의미의 사회적 기업 등으로 제각각 부른다. 또한 이런 용어를 쓸 때, 어느 지역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용어의 개념이 조금씩 달라진다.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은 협동조합이 발달한 유럽 지역에서 주로 많이 쓰는 말이고 사회적 기업을 정의하는데 있어서도 유럽식 개념과 미국식 개념이 다르다. 그리고 또한 한국에서의 사회적 기업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취약 계층에 대한 자활사업, 사회적 일자리 서비스의 후속 개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위코노미’ 속에 배어 있는 기독교적인 가치를 찾아 같이 나누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2008년 가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18%만이 기독교를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이것을 학점으로 매기면 C+ 수준이라고 한다. 한국 기독교가 다시금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교회가 갖고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마이크로크레딧, 사회책임투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같은 위코노미의 각 영역의 처음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거나 기독교정신이 깊숙이 배어 있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적 기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20세기 초반 ‘자선이 아닌 기회’를 외친 미국의 감리교 목사 에드가 헬름즈였다. 그리고 공정무역을 시작한 사람은 영국의 양심 윌리엄 윌버포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소액대출 마이크로크레딧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호주 출신의 기업인이며 성공회 신자인 데이비드 부소가 있다.
또한 사회책임투자가 시작되기까지에는 감리교의 창시자 영국의 존 웨슬리와 그 후예들의 경제윤리가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적인 사회책임투자의 시작 역시 1971년 두 명의 미국감리교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역시 우리에게 알려진지는 몇 년 안 되었지만 이미 100여 년 전에 퀘이커교 집안인 ‘캐드버리’ 가문은 노동자들과 지역사회를 위해 기업의 경영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도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을 잘 이겨낸다. 위에 제시된 위코노미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사례들은 뿌리 깊은 나무와도 같다. 비록 사회적인 신뢰도가 C+정도밖에 안 되지만 신앙의 선배들이 닦아 놓은 뿌리가 있기에 희망이 있다. 그들이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마음을 갖는다면 신뢰는 회복될 것이며,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목마른 사람들의 목을 축여줄 것이다. 마치 시원한 여름의 냉수 한 그릇처럼 말이다.
이 책을 기획하면서 모티브가 된 책이 바로 현대 복음주의 거장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가 쓴 ‘현대 사회와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다.
80대 후반의 노년의 삶을 보내고 있는 존 스토트는 일생을 설교자, 목회자, 학생운동지도자, 신학자, 실천가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가 일생동안 끼쳐온 전세계적인 영향력과 사역은 기독교 역사에 길이 기억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 타임스지와 타임지는 그를 개신교계의 카톨릭 교황 같은 인물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존 스토트는 로잔언약의 입안자로도 참여했고,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LICC London Institute for Contemporary Christianity)를 창립 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는 복음의 총체적인 측면, 즉 복음이 교회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의 정립하고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존 스토트가 1984년에 저술한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당시 영국 사회가 당면했던 제반 문제에 대한 신앙적인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의 영국은 일명 대처리즘이라 불리는 신자유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복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고질적인 ‘영국병’을 앓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상은 미국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과거 중요한 시장역할을 했던 식민지는 대부분은 분리 독립되었다.
사회문화적으로 실업문제가 대두되었고 동성애, 낙태, 해외 이민자 유입 등 과거에는 중요치 않게 생각했던 새로운 이슈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반면 교회의 젊은이들은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고 있었고 과거에 세워진 많은 교회들이 술집과 나이트클럽, 식당으로 용도 변경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나온 책이 바로 『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다. 영문제목으로는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인데 직역해 보면 ‘오늘날 기독인들이 당면한 문제들’이다. 존 스토트는 이 책에서 왜 기독인들이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핵무기, 환경, 국가간 경제 불균형, 인권과 같은 국제적 문제들과 노동과 실업, 다민족사회, 빈곤, 결혼과 이혼, 낙태, 동성애와 같은 사회문화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출간된 지 20여 년지 지났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 당면한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읽어도 별 무리가 없다.
‘한국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을 기대하며
존 스토트 목사는 세상과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늘 특히 이중적 귀 기울임(double listening)을 강조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으로 듣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신뢰를 잃은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중적 귀 기울임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기 위해서는 열심이지만 막상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데는 부족한 면들이 있었다.
이제는 한국 교회도 교회 안의 울타리를 넘어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대안을 찾아 실천하는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일어났으면 좋다. 물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금으로 빛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들도 많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경영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 한반도평화연구원, 공의정치연대, 좋은교사운동, 한국리더십학교, 남북나눔운동, 월드비전, 여명학교, 성서한국 등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분들이 이일을 함께하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이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했다면, 이제는 그동안 관심이 있었지만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더욱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심해질수록 교육의 양극화가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공교육이 점점 더 붕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교육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바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한국 사회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의 숫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한국 사람으로 정착하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해서 아직 우리는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하지 못하고 있다. 누가 이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바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요즘 ‘88만원 세대’, ‘이태백’, ‘청년실업’이란 말로 자신들의 처한 상황을 한탄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의 선배들이 불의와 저항하며 도전했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전설이 되었을 뿐이다. 누가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용기를 주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 바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의 수가 2만 명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다. 이제 머지않아 5만 명을 넘어 10만 명을 바라 볼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탈북자 문제와 도래할 통일에 대해 사회적 관심은 무뎌지고 있다. 누가 탈북자들의 남한 내 자립에 도움을 주고 장차 도래할 통일한국을 준비할 수 있을까? 바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